일부 내용을 다듬었고 각주와 용어 해설 등을 추가해 설명을 보완했다.


이 사회에 차별의 뿌리가 깊음을 보여 주는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성별, 성적지향, 인종, 장애 등 온갖 이유로 차별이 부추겨진다.

이런 차별의 경험은 사람들이 저항에 나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최근에만도 미국에서 경찰의 조지 플로이드 살해에 항의하는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 세계적 미투 물결 등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불법촬영 범죄에 대한 국가의 미온적 대처와 낙태죄 등 여성 차별에 항의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저항에 나선 사람들이 모종의 정체성 정치를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차별받는 집단의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그 정체성을 중심으로 단결해 차별에 맞서자고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렇다면 정체성 정치는 무엇이며, 차별에 맞서는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을까?

2020년 미국을 뒤흔든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 ⓒ출처 Robert Bulmahn(플리커)

우파들의 정체성 정치 때리기

서구에서 우파들은 차별에 도전하는 운동들을 침묵시키기 위해 “예민함”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그들은 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반대하는 경향을 공격하고 정체성 정치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을 부추긴다. 이는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 트랜스젠더 권리 운동, 미투 운동 등을 폄훼하고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공격은 우파들이 벌이는 ‘문화 전쟁’ 전략의 일환이다. 우파들은 트랜스젠더나 유색인종, 무슬림 등이 자국의 문화와 전통적 가치를 해친다고 비난한다.

서구의 극우 정치인이나 한국의 개신교 우파와 염수정 추기경은 “젠더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를 쓰며 성소수자들의 성 정체성을 그저 실존하지 않는 허구적 관념일 뿐인 양 취급한다. 그리고 성소수자와 트랜스젠더가 “가족 가치”를 위협한다고 비난한다.

우파들이 정체성 정치를 공격하는 이유는 경제 위기와 불평등으로 인한 대중의 불만을 호도하고 노동계급 일부를 우파적 의제로 묶어 두기 위해서이다. 강경 우파인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이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자를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도 이런 목적 때문이다.

한국에서 국민의힘 대표 이준석 등 우파 정치인들과 일부 민주당 정치인들이 20대 남성이 ‘역차별’ 받고 마치 여성 차별이 사라진 양 치부하는 것도, 청년들을 성별로 이간질하며 이들의 불만을 호도하는 것이다.

우파적 정체성 정치?

때로는 우파들도 반동적인 의제들을 강화하려고 정체성 문제를 이용한다. 예컨대, 미국 우익들은 인종 간 ‘문화적 차이’를 내세우며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을 공격했다. 한국 우파도 ‘한민족’ 정체성을 내세워서 이주민·난민 혐오를 선동한다. 이들은 2018년, 제주 예멘 난민 입국에 반대하면서 ‘국민이 우선이다’ 하고 선동했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 중에는 좌파의 정체성 정치와 우파의 정체성 정치를 뒤섞어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역사의 종말”이라는 말로 유명한 신보수주의자였다가 최근 자유주의자가 된 논평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이런 관점을 대변한다. 그는 정체성 정치를 자유주의의 전진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좌파의 정체성 정치와 우파의 정체성 정치를 도매금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우파가 정체성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과 좌파의 정체성 정치를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 우파의 ‘정체성 정치’는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사회 시스템을 지키려 한다. 반면 차별받는 사람들의 정체성 정치는 차별에 대한 반발이자, 차별 반대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정체성 정치라는 용어를 좌우 구분 없이 쓰면 혼란을 낳기 십상이다. 좌파적·진보적 운동에 대해서만 쓰는 것이 적절하다.(이제부터는 차별받는 사람들의 정체성 정치를 다루겠다.)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정체성은 매우 개인적이다. 차별받는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은 반격에 나설 자신감을 키우는 과정의 일부일 수 있다. 예컨대, 동성애를 억압하는 사회에서 동성애자가 커밍아웃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해방감을 주는지 생각해 보라.

그러나 차별에 대한 분석을 개인적 경험으로 축소시킬 수는 없다. 정체성이 사회 세력에 의해서 형성됨을 이해해야 한다. 얼마 전 한국에도 번역돼 나온 《오인된 정체성》의 저자인 미국의 사회주의자 아사드 하이더는 정체성이 “다양한 사회 관계들에 대응해 우리의 자아를 형성하는 방식”에 조응한다고 지적한다.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형성된다는 점은 사람들이 정체성에서 손쉽게 ‘탈퇴’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예컨대, 어떤 개인은 자신이 성소수자이거나 여성인 것이 정체성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파들이 동성애·트랜스젠더 혐오와 여성 차별을 부추기면, 자신이 그런 정체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느냐와 관계없이 편견과 차별의 대상이 된다. 이는 미국이 벌인 ’테러와의 전쟁’ 이후 이슬람 혐오가 부추겨지면서 많은 무슬림이 겪은 일이기도 했다.

정체성 정치와 그 한계는 무엇인가?

가장 기본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정체성 정치는 공통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동성애자해방전선, 블랙파워 같은 1960년대 말~1970년대 서구의 대중 운동이 중요한 사례다. 이 운동들은 급진적이었고 실질적인 성과를 쟁취했다.

한국에서는 2018년 불법촬영에 항의한 ‘불편한 용기’ 시위가 정체성 기반 정치 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였다고 할 만하다. 이 시위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대중적인 여성운동이었고, 여성 수만 명을 거리 시위에 동참시켰다. 그런데 이 시위의 주최측은 오로지 여성만이 여성 차별을 이해하고 그에 맞설 수 있다는 전제에 따라 시위 참가 대상을 여성으로 엄격히 한정했다.

2018년 불법촬영에 항의한 ‘불편한 용기’ 시위는 정체성 기반 정치 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였다. ⓒ이미진

그러나 정체성 기반 정치에는 중요한 한계가 있다. 우선, 공통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조직하는 것은 ’해방을 어떻게 쟁취할 것인가?’라는 전략 문제를 답하지 않은 채 남겨 둔다. 더 높은 자리에 더 많은 여성이 올라가거나 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기업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르는 것이 우리의 해방 전략이어야 할까? 혹은 여성 소유 기업이 더 늘어나는 것이나 “핑크 머니”(성소수자 커뮤니티의 구매력과 이로부터 파생되는 성소수자들의 소비)를 통한 자립이 해결책일까?

그래서 정체성을 중심으로 단결한 운동은 초기에 광범한 단결을 이루는 듯했다가도 운동이 위기에 봉착하면 전략 문제로 첨예하게 분열하기도 한다.(‘불편한 용기’ 운동이 그런 사례였다.)

둘째, 특정 정체성 안에 누가 포함되고 누가 포함되지 않는지 하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운동을 분열시킬 수 있다. 흑인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백인과 흑인 사이 혼혈도 포함되는가? 또는 여성은 어디까지인가? 이성애자 여성이나 트랜스 여성은 여성인가? 이른바 “진짜 여성” 논란은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입학을 둘러싼 논란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셋째, 정체성 정치는 차별받는 사람들이 계급에 따라 처지가 판이하다는 사실을 종종 무시한다. 물론 인종차별이든, 성차별이든, 성소수자 차별이든 차별은 계급을 넘어 나타난다. 지배계급 내 흑인, 지배계급 내 여성, 지배계급 내 성소수자도 차별이나 비하를 겪는다. 우리는 그 차별이 누구를 향하고 누구에게서 오든 그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차별과 착취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계급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첫째, 계급은 사람들이 차별을 경험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예컨대, 신세계백화점, 호텔신라, 마켓컬리를 운영하는 부유한 여성 CEO들의 삶과, 거기서 일하는 노동계급 여성의 삶은 판이하게 다르다.

둘째, 계급에 따라 기존 질서 수호의 이해관계도 달라진다. 예컨대, 영국의 런던광역경찰청장 크레시더 딕은 레즈비언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는 현직 경찰관의 여성 살해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탄압했다. 그녀가 이끄는 무장 경찰이 체제 속에서 하는 구실이 지극히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셋째, 차별에서 계급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단지 추상적인 얘기가 아니다. 운동의 발전과 관계있다. 예컨대, ‘불편한 용기’ 시위가 문재인 정부를 정면으로 겨냥하자, 문재인 정부는 페미니스트 진선미를 여가부 장관에 앉혀서 운동을 통제하려 했다.1

영국에서 현직 경찰관의 여성 살해와 시위 진압에 분노한 사람들이 크레시더 딕의 퇴진을 요구했을 때, 일부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 지도자들은 여성 경찰청장의 사임은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가 후퇴하는 것이라며 퇴진 요구를 반대했다. 다행히 운동 내 다수가 이런 주장에 동조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 페미니스트 지도자들의 주장이 관철됐다면 운동이 크게 약화될 수도 있었다.

계급 분단선을 무시하면 차별받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기업인이나 국가 관료 등 지배계급(아마도 그 일부이겠지만)과도 동맹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빠지기 쉽다. 그래서 정체성 정치는 힘깨나 쓰는 축에 편입되고자 하는 중간계급 여성·성소수자·소수인종 등에게 더 유용한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계급 분단선 흐리기는 노동계급 대중이 차별에 맞서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별을 낳는 사회 시스템을 지키는 것이 득이 되는 사람들을 아군으로 오인하게 해, 우리 측의 전열을 흐트러뜨리기 때문이다.

그 한 사례는, 지난해 8월 문재인 정부가 방역을 핑계로 노동자들의 저항을 억압할 때 국무총리 김부겸과 함께 민주노총을 직접 찾아와 민주노총 집회 취소를 압박했던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김수경 민주노총 여성국장이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칭송한 일이다. 그 방문 이후 정부는 민주노총 집회를 방해하고 양경수 위원장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그런데도 김수경 국장은 나순자 보건노조 위원장과 정은경 청장이 함께 사진을 찍은 걸 공유하며 이렇게 썼다. “코로나 팬데믹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는 두 명의 여성 리더들. 이 정도면 야전사령부지. 보는 것만으로도 웅장해짐.”

더구나 당시는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정부의 (방역을 빌미로 한) 탄압으로 큰 곤경을 겪고 있었을 때였다. 이를 고려하면 민주노총 간부인 김수경 국장의 견해는 매우 부적절했다.

넷째, 정체성을 단결의 기준으로 삼으면, 그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는 집단은 차별 개선이 득이 되지 않거나 심지어 차별에서 득을 보는 집단이라고 잘못 보기 쉽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일반을 여성에 대한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고, 성소수자 운동 내에서도 이성애자의 ’특권’을 문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차별에서 진정으로 득을 보는 자들이 누구인지 잘못 짚어서, 우리가 진정으로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을 오인하게 만든다.

분열의 위험

이런 이유로 정체성 기반 운동들은 초기에 크게 단결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곧 분열의 위험을 드러내곤 했다. 역사적 경험도 그렇다. 최초의 자긍심 행진은 1969년 경찰에 맞선 소요였던 스톤월 항쟁의 여파로 벌어졌다. 트랜스젠더들은 스톤월 항쟁의 중요한 일부였다.

그러나 불과 몇 년 뒤, 샌프란스시코 자긍심 행진의 주도자 일부는 트랜스젠더와 드랙*의 참여를 거부했고, 결국 1973년 샌프란시스코 자긍심 행진은 둘로 쪼개졌다.

운동이 위기를 겪고 사기저하에 빠질수록 정체성 정치는 운동 참가자들 내부의 차이점에 더 주목하면서 운동 내에서 ’가해자’를 찾고 탓하는 경향으로 가기 쉽다. 이런 위험성은 오늘날의 운동 내에도 만연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해방 전략

그렇다면 차별에 맞설 효과적인 전략은 무엇인가?

차별은 인간 사회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아니라 계급 사회와 자본주의에서 비롯한다. 지배계급은 차별을 통해 노동계급을 이간질해 각개격파하려 한다.

이런 차별은 노동계급 내 차별받는 집단만 취약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의 처지를 약화시키고, 착취 체제를 영속시킨다.

차별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한다면 그 체제를 분쇄할 힘을 가진 세력은 누구인가?

차별받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노동계급이기도 하다. 그래서 계급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대중이 가장 광범하게 단결할 수 있는 공통 기반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수라는 점뿐 아니라, 이윤을 생산하고 이를 멈춤으로써 자본주의 체제를 멈출 특별한 잠재력이 있다.

이 점은 팬데믹 기간에 훨씬 생생하게 드러났다. 팬데믹 동안 우리는 지배자가 아니라 보건, 택배, 콜센터, 화물 등 수많은 “필수 노동자”들이 사회를 돌리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게다가 노동자의 노동 없이는 이윤을 계속 추출할 수 없다. 때문에 사용자들은 확진자가 생겨도 업무를 중단시키지 않았고, 안전해지기 전에 노동자들을 다시 일터로 몰아넣었다.

계급 차별이 존재하고 이에 반대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급이 단지 여러 차별의 목록 중 하나일 뿐인 것은 아니다.

착취, 즉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서 이윤을 추출하는 과정은 지긋지긋하다. 이 착취에서 사회의 온갖 불평등이 생겨난다.

그러나 착취는 차별과 달리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할 잠재력을 주기도 한다. 자본가들이 이윤을 추출하려면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사실에서 이런 능력이 생겨난다.

물론 노동계급의 의식은 모순돼 있고 불균등하다. 이런 상태만 보면 좌절감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지 현재 상태가 아니라 그 잠재력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1917년 러시아 혁명, 1968년 세계적 반란, 한국의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등 노동계급 투쟁이 거대하게 전진했을 때 그 성과로 차별도 크게 개선돼 왔다.

그렇다고 해서 차별을 부차적으로 여기거나 차별 반대 운동이 계급 투쟁의 ’초점을 흐린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또한 차별로부터의 해방이 노동계급 투쟁에 저절로 따라온다고 보아서도 안 된다.

물론 좌파들 중에는 이런 “계급 환원주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지금도 있다. 최근 서구 좌파의 일부(특히 독일 좌파당의 한 지도자인 자라 바겐크네히트)도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면서 소위 “계급 쟁점”(실제로는 먹고사는 문제만 다루는 협소한 “경제주의”)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국에서는 국제주의와 차별 반대를 주장한 제러미 코빈이 총선에서 패배한 이후 이런 주장이 만연하다.

이는 우리가 거부해야 하는 접근법이다.

러시아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장했듯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단지 “노동조합 사무국장”이 아니라 “대중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 “그것이 어디에서 나타나든, 어떤 계층이나 계급의 사람들이 영향을 받든 모든 폭정과 차별의 징후에 대응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징후들을 보편화하고 경찰 폭력과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단일한 전체 그림을 제시해야 한다.”(《무엇을 할 것인가》)

트로츠키는 1929년 흑인 해방을 지지하는 토론에서 “단지 흑인에 대한 편견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 의식 속에서 흔적도 없이 불태워 버려야 한다” 했다.

후원 vs 연대

이런 분석에 따르면, 차별은 당사자의 문제로만 축소돼서는 안 된다.

‘동성애 혐오는 성소수자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문제 아닌가?’ ‘성차별은 여성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문제 아닌가?’ 물론 맞다. 하지만 차별에 맞서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 큰 물음을 던져야 한다. ‘이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에 이러저러한 차별이 하는 구실은 무엇인가?’

레닌과 트로츠키는 지배계급이 차별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그들의 분노를 엉뚱한 데로 돌리고,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 한다고 분석했다.

남성, 이성애자, 시스젠더* 노동계급이 체제에 의한 차별에서 득을 본다거나, 성차별과 성소수자 혐오에 맞선 투쟁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구실은 그저 ’후원자’에 불과하다는 견해에 반대해야 한다.

차별에 반대하고, 노동계급을 끊임없이 분열시키며 그 분열에 의존하는 체제에 맞서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차별 반대 운동에 참여하고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광범한 단결과 연대를 구축했을 때 운동이 더욱 강력해질 수 있다.

차별에 맞선 광범하고 대중적인 투쟁

레닌이나 트로츠키를 인용한 것은 그저 한물간 옛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차별로부터의 해방과 착취로부터의 해방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지배계급의 이간질과 각개격파에 맞서려면 우리는 광범하게 단결해야 한다.

그래서 착취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노동계급은 그 내부의 각종 차별을 극복해야만 한다. 또한 차별에 맞선 운동이 강력히 전진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대중의 광범한 참여가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고립되거나 연대를 충분히 받지 못한 투쟁은 성과를 이루기가 더 어렵다.

그러므로 차별 반대 운동은 특정 정체성을 중심으로 협소하게 단결하는 것을 넘어, 노동계급 대중이 광범하게 참가할 수 있는 개방적이고 급진적인 투쟁이 돼야 한다.

만약 이런 차별 반대 운동에 노동계급의 사회적 권력이 더해진다면 운동의 승산은 더 커질 수 있다.

이것은 단지 노동조합의 과제일 수 없다. 노동조합은 기본적으로 조합주의적(경제적이고 부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노동조합을 이끄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이런 경향을 더 강화시킨다. 그래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여성운동이나 성소수자 운동에 참가하거나 지지를 표명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선언이나 슬로건 또는 지도자의 기자회견·집회 참가 수준 이상으로 차별 반대 운동에 자신의 조합원을 실질적으로 동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실질적으로 차별에 맞서는 방향으로 노동자들을 이끌려면 노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보수적인 관념에 도전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는 때로 노동조합 내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예컨대, 공공부문 노동조합 조직들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둘러싸고 논쟁들이 벌어져 왔다.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거나 개선하기 위한 운동에 (일부) 정규직 조합원들이 반발하고 나서자, 노조가 분열할 것을 우려한 지도부가 정규직화에 미온적이거나 심지어 반대하는 일들도 종종 있었다. 전교조에서는 좌파 지도부가 기간제 교사 정규직화를 지지하기를 거부했다.

영국에서는 학교 노동자들의 노조인 NEU에서 트랜스젠더 권리 지지를 놓고 큰 논쟁이 있었다. 좌파 관료들은 이를 회피하거나 반대했다. 하지만 노조에 속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좌파 관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이 트랜스젠더 권리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 앞장섰다.

즉, 차별에 실질적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부문주의를 극복할 정치가 있어야 한다. 그런 정치를 벼리고 실제 실행에 옮기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차별과 착취가 하는 구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이를 잘 아는 사람들이 혁명적 조직으로 결속해서 운동의 단결을 위한 토론과 논쟁을 하면서, 차별에 맞선 운동과 착취에 맞선 운동을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1. 당시 불편한 용기 시위를 이끌었던 워마드 계열의 페미니스트들은 문재인 정부에 친화적인(혹은 입각한) 기존 여성 운동과 미묘한 긴장을 빚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진선미 의원에 대한 지지가 있어왔다. 예컨대, 메갈리아(이후 워마드로 대체로 흡수됨)는 2015년 진선미 의원에게 후원금을 보내고, 2016년 총선 때는 공식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었다. 이런 이유에서 정부는 진선미를 앞세우는 게 정부를 향한 운동의 예봉을 꺾는데 좀 더 효과적이라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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